사람이 태어나서 세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둘째, 배우자를 잘 만나고 셋째,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데.

필자에겐 스승과 다름없는 김문숙(소설, 수필가) 씨를 만난 것은 1974년 부산 광안리에서 ‘컬러TV 냉동사’(電子 Service)라는 전파사를 경영할 때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을 시청하는 안테나를 개발하여 시험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와 일본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부탁하는 분은 관부(關釜) 훼리호 여행사 대표였다. 배 이름은 ‘아리랑호’다. 부산~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왕래하는 관부(關釜) 여객선이다.

일본 방송을 꼭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지닌 채 그분이 안내하는 대로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분은 1960년대 사업상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 일본 문화를 접하려고 일본 방송 시청을 원했던 것이다. 필자는 지향성(志向性)이 강한 안테나로 최선을 다해 방송을 Turn on 완성했다.

저녁때 그분을 다시 만나 테이블에 앉아서 흐뭇한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청운의 꿈을 이룬 성공담을 들려주었다. 인자한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만남인데도 얼마나 나를 신뢰하였던지 안방 열쇠를 건네주면서 집에 모든 전기, 전자 서비스 업무를 전적 위임해 주셨다. 그분이 바로 김문숙 씨였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 덕분에 중앙동 여객선 사무실에 들러 아리랑호에 승선하여 구내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필자가 일본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맏형이 일본 오사카(大阪支部) ‘재일거류민단’ 단장으로 재일교포였기 때문이다. “옳지, 저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돈 벌어 와야지” 하는 생각이 행동이 되고, 환경을 넘어 실행할 줄이야!

사전에 일본어 학원도 다니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물론 불법으로 밀항하게 된 것이다. 당일 일찍이 승선해서 배 밑창 기계실에 숨었다. 배가 출항 시간이 되어 “쾅!” 하는 소리에 내 눈앞에 큰 터빈이 돌아갈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얼마나 놀랐는지? 게다가 밤중에 멀미가 심하여 더 참을 수가 없어 계단에 올라오다가 선원에게 붙잡혔다. 그 당시 부산에는 밀항자가 많았다.

선장실로 가니 다른 밀항자도 붙잡혀 와 있었다. 사고를 쳤으니, 선장에게 당연히 뭇매도 맞았다. 선장이 해경 경비선에 연락하여 우리를 인계하고, 선장은 전말서도 써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아무튼 민폐를 끼치고 ‘밀항단속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벌을 받았다. 

김문숙 작가를 재조명해 보면 그녀는 1948년 진주여고 교사 시절 수필가로서 essay를 쓰면서 여성 교육 의식과 지위 향상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 ‘종군위안부’ 사건을 그가 들추어 사건화한 인물이었다. 치마를 둘러서 여자였다.

그는 퇴임 후, 본격적으로 부산 수영구 수영동에 세운 ‘위안부 역사관’에는 외국을 다니면서 모은 자료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빼곡히 불행했던 과거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수필집 ‘교수할래? 농부 할래?’와 ‘판검사가 망친 대한민국’은 추악한 법조인이 각성하길 바라는 ‘부패 진단 보고서’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재판이 개판이다’(김경근 著)라는  책자 명처럼 필자도 재판부의 부패함을 경험했다.

1992년부터 김문숙 작가는 관부 재판을 홀로 떠안고 대한해협을 넘나들면서 위안부의 한 맺힌 사연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그가 펼친 운동으로 일본의 과거 역사가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활동을 영화화한 것이 바로 히스토리(history)다.

이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의 타계했지만, 아직도 대일 관계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 성 피해 여성들의 미투(me too)와 위드 유(With You), 성폭력과 여성 혐오에 맞서 발 빠른 젊은 여성들의 담론의 결과, 법적으로 처벌받는 미투법이 시행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어 전국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독일 베를린, 레겐스 브루크에 소녀상이 설치되었고, 미국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에도 설치되었으며, 호주 시드니, 캐나다 토론토, 대만, 필리핀 마닐라에도 소녀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우익단체와 끊임없이 힘들게 싸워왔다.

몇 년 전 ‘수영 역사관’에 찾아갔을 때, 그는 예뻤던 얼굴도 몸도 다 망가져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의 머리맡에는 일본을 상대했었던 ‘관부 재판기록물’ 자료들이 집채와 같이 쌓여 있었다. 연약한 여성으로서 세상을 변혁시키려니 쉬운 일이던가?

그녀는 ‘아리랑 관광여행사’ 대표로서,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평탄하게 잘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94세(1927~2021)의 일기로 부산 외곽지역 정관에서 사회 시민운동가로 큰 업적을 남긴 채 그 많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헌납하고 누가 봐도 힘들었던 청빈한 생을 마감했다.

김경근 기자 1943kjt@silver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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